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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부동산개발회사로의 전환 모색

50-YEAR STORY

삶의 혁신, 그 첫발

종합부동산개발회사로의 전환 모색

1969 삼성그룹 광고문, 중앙개발은 건축·목축으로 소개됐다.
1967년 우리나라 인구가 3000만 명을 돌파하면서 주택난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의 인구증가율이 두드러졌는데 전 도시인구의 43%를 차지했다. 서울의 과밀화는 자연스럽게 주택난 심화를 초래했다. 이에 대응해 중앙개발은 사원들의 주택비용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1969년 11월 서울 사당동 A,B지구에 삼성사우촌을 건립, 무주택사원 109명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 조성된 택지를 삼성사원은 물론 일반에게도 분양해 중앙개발은 1차 택지조성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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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개발은 택지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 부동산의 확보와 관리분야에서 개발분야로 업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70년 4월 사당동 C지구에 1차년도 사업용지 2배에 달하는 15만 5372m²(4만 7000여 평)의 부지를 확보, 먼저 1년 여의 기간 동안 순대지 8만 1316m²(2만 4598평), 267필지의 택지를 조성하고 택지분양에 착수했다. 택지분양은 총 3차에 걸쳐 이뤄졌으며, 택지조성공사 완료 전에 이미 207필지가 분양됐다. 그러나 택지조성의 과잉열기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서 택지조성사업은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쳤다. 이에 중앙개발은 택지조성사업을 주택사업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삼성뉴타운 사업을 본격화했다. 이미 삼성빌딩과 중앙매스컴센터 등을 건설하며 중앙개발은 외형이나 기술 면에서 단연 업계 우위 수준에 서 있었다.
1969 성균관대 과학관 완공
1971년 8월 삼성뉴타운 안양지구 52동을 건설해 성공적으로 분양한 중앙개발은 서울 명일동에 3개년 동안 190동의 주택건립을 계획했다. 그러나 1971~1972년 동안 건립, 분양한 73동은 입지의 불리함과 높은 분양가로 분양률이 저조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1971년 서울외곽지대에 개발제한지역(그린벨트) 지정이 이뤄지면서 주택건설사업도 불황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주택사업의 침체 속에서도 중앙개발은 건설회사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토목과 건축의 기본계획, 조사, 설계, 자재 구매조달, 시공감리를 주 업무로 하면서 주요 공사에 참여했다. 1965년 중앙매스컴빌딩 신축, 1966년 삼성빌딩 신축을 시작으로 1968년 고려병원 신축, 삼성물산 경산공장 신축, 성균관대학교 과학관 신축, 호암관 신축, 1969년 신세계백화점 증축 및 개보수공사, 1970년 삼성물산 구로동공장 신축, 1971년 동방생명 경남지사(영남총국) 신축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를 통해 중앙개발은 국내 정상 수준의 건설기술력을 확보하면서 업계 위상을 높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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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개발 판매비상체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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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개발은 부동산 경기침체로 택지조성사업과 주택사업에 있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1971년 8월 24일 판매비상체제를 선언하고 '회사목표 14억, 개인목표 630만 원'의 기치를 내건 '전 사원 세일즈맨 운동'을 1972년까지 전개했다. '1인 1필지'를 목표로 판매부진 타개를 위한 총력판매에 돌입한 결과 명일동지구 194필지 중 164필지, 안양지구 126필지 중 116필지를 판매하는 성과를 거뒀다.
1972년에는 판매부진 타개책으로 주택서비스센터를 운영했다. 주택서비스센터는 주택의 일반수리, 증축ㆍ개축ㆍ신축의 설계ㆍ감리ㆍ시공, 주택의 내부설치 보완 및 인테리어, 각종 기술상담 및 진단 등을 주 업무로 하여 1년 동안 운영됐다. 특히 중앙개발에서 건립한 주택뿐 아니라 일반주택을 대상으로도 서비스를 펼쳐 기업의 이미지 향상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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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완공된 2200평의 고려병원
  • 1969년 건설공사가 한창인 성균관대 과학관
  • 영등포구 사당동의 삼성사우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