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개발을 위한 초석, 중앙개발의 출범
50-YEAR STORY
삶의 혁신, 그 첫발
국토개발을 위한 초석, 중앙개발의 출범
1951년 1월 설립한 삼성물산을 필두로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삼성물산을 잇달아 설립하며 경영다각화를 이룬 삼성은 1962년 착수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발맞춰 수출증대를 도모, 비약적으로 사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1958년 안국화재에 이어 1963년 동방생명보험을 인수함으로써 삼성은 손해보험업과 아울러 생명보험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1963년에는 라디오, TV, 신문을 포괄한 언론사업부문의 청사진도 제시했다. 사업을 통해 국가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이병철 선대회장의 '사업보국' 정신을 근간으로 삼성은 무역업에 기반해 제조업, 금융업, 방송업 등 각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우리나라 최대 기업군으로 성장했다.
이에 당시 산재해 있던 그룹 각 사를 한 군데로 수용, 결집해 안정적 사업기반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자 삼성은 기업의 규모와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사옥 마련을 추진했다. 또 언론사업 청사진을 구체화시켜 종합매스컴센터 건립과 신문용지의 원활한 공급을 위한 제지공장 설립을 함께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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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시 산재해 있던 그룹 각 사를 한 군데로 수용, 결집해 안정적 사업기반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자 삼성은 기업의 규모와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사옥 마련을 추진했다. 또 언론사업 청사진을 구체화시켜 종합매스컴센터 건립과 신문용지의 원활한 공급을 위한 제지공장 설립을 함께 모색했다.
그리하여 1963년 12월 23일 '동화부동산(주)'을 설립, 그룹사옥과 종합매스컴센터 건립, 제지공장과 조림용지 확보 등을 전담하는 전문회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동화부동산은 가장 먼저 그룹사옥인 '삼성빌딩' 건립에 착수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평소 삼성의 긍지를 나타낼 수 있는 국내 최고 규모와 시설의 빌딩을 구상하고 있었다. 동화부동산은 설립과 동시에 동방생명으로부터 1147m²(346.9평) 규모의 서울 을지로 1가 50번지의 부지를 매입하고 1964년 4월 2일 기공식을 가졌다. 지하 2층, 지상 10층, 옥탑 2층의 그룹사옥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와 함께 삼성물산에서 실무를 맡고 있던 중앙매스컴빌딩 건립 추진을 이관받아 설계 업무를 시작하고 1964년 4월 27일 착공했다.
동화부동산은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한 종합매스컴센터인 중앙매스컴빌딩을 1965년 9월 22일에, 그룹사옥인 삼성빌딩을 1966년 1월 31일 준공했다. 중앙매스컴빌딩과 삼성빌딩 모두 기존 빌딩과 차원을 달리하는 첨단 빌딩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으며, 동화부동산은 회사 성장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5년에 중앙매스컴센터를 중앙일보에 매각하게 되어 임대사업에 차질이 생겼고, 이어 삼성그룹에서 새한제지를 인수함으로써 제지공장 설립 검토가 무산되는 등 동화부동산은 회사 설립 시 목표했던 사업계획을 잇달아 철회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업 침체는 당시 사업을 검토하고 있던 조림사업과 골프장 건설 추진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동화부동산의 제반상황을 수습하고 조림 및 임산업, 토지개발, 과수원 및 원예업, 택지조성 등을 사업목적으로 하여 1966년 5월 4일 '중앙개발(주)'을 발족했다. 중앙개발은 설립 이후 당시 시급한 국가과제였던 산림녹화를 비롯한 국토개발사업 추진에 앞장섰으며, 이와 함께 조림, 펄프원목 공급, 골프장 건설 등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다.
동화부동산은 가장 먼저 그룹사옥인 '삼성빌딩' 건립에 착수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평소 삼성의 긍지를 나타낼 수 있는 국내 최고 규모와 시설의 빌딩을 구상하고 있었다. 동화부동산은 설립과 동시에 동방생명으로부터 1147m²(346.9평) 규모의 서울 을지로 1가 50번지의 부지를 매입하고 1964년 4월 2일 기공식을 가졌다. 지하 2층, 지상 10층, 옥탑 2층의 그룹사옥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와 함께 삼성물산에서 실무를 맡고 있던 중앙매스컴빌딩 건립 추진을 이관받아 설계 업무를 시작하고 1964년 4월 27일 착공했다.
동화부동산은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한 종합매스컴센터인 중앙매스컴빌딩을 1965년 9월 22일에, 그룹사옥인 삼성빌딩을 1966년 1월 31일 준공했다. 중앙매스컴빌딩과 삼성빌딩 모두 기존 빌딩과 차원을 달리하는 첨단 빌딩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으며, 동화부동산은 회사 성장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5년에 중앙매스컴센터를 중앙일보에 매각하게 되어 임대사업에 차질이 생겼고, 이어 삼성그룹에서 새한제지를 인수함으로써 제지공장 설립 검토가 무산되는 등 동화부동산은 회사 설립 시 목표했던 사업계획을 잇달아 철회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업 침체는 당시 사업을 검토하고 있던 조림사업과 골프장 건설 추진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동화부동산의 제반상황을 수습하고 조림 및 임산업, 토지개발, 과수원 및 원예업, 택지조성 등을 사업목적으로 하여 1966년 5월 4일 '중앙개발(주)'을 발족했다. 중앙개발은 설립 이후 당시 시급한 국가과제였던 산림녹화를 비롯한 국토개발사업 추진에 앞장섰으며, 이와 함께 조림, 펄프원목 공급, 골프장 건설 등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다.
한편 동화부동산은 기존 건설 위주의 조직을 빌딩관리조직으로 개편해 삼성빌딩의 내부설비를 보완하고 임대유치에 전력을 투입했다. 그 결과 준공 시 53%에 그쳤던 임대율이 80%까지 신장돼 경영이 안정화되자 1966년 8월 30일 '동화진흥(주)'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중앙개발은 1967년 3월 그동안 추진하던 조림사업 일체를 전주제지(전 새한제지, 현 전주페이퍼)에 이관했다. 회사 설립의 원대한 포부였던 국토개발사업의 포기로 사세가 위축되면서 새로운 진흥책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사업영역 확대를 원하던 동화진흥과 골프장 건설을 위한 안정적 재원확보가 필요했던 중앙개발은 합병에 의견을 모으고 1967년 3월 31일 합병계약을 체결했다. 중앙개발을 흡수 합병한 동화진흥은 그해 6월 20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중앙개발로 상호를 변경하고, 6월 30일 상호변경 등기를 마치며 새로운 탄생을 알렸다. 중앙개발은 삼성빌딩의 임대사업, 골프장 건설, 건설사업, 개발사업 등 4개 부문으로 사업영역을 재편하고 본격적인 성장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중앙개발은 1967년 3월 그동안 추진하던 조림사업 일체를 전주제지(전 새한제지, 현 전주페이퍼)에 이관했다. 회사 설립의 원대한 포부였던 국토개발사업의 포기로 사세가 위축되면서 새로운 진흥책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사업영역 확대를 원하던 동화진흥과 골프장 건설을 위한 안정적 재원확보가 필요했던 중앙개발은 합병에 의견을 모으고 1967년 3월 31일 합병계약을 체결했다. 중앙개발을 흡수 합병한 동화진흥은 그해 6월 20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중앙개발로 상호를 변경하고, 6월 30일 상호변경 등기를 마치며 새로운 탄생을 알렸다. 중앙개발은 삼성빌딩의 임대사업, 골프장 건설, 건설사업, 개발사업 등 4개 부문으로 사업영역을 재편하고 본격적인 성장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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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가 있으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풍기는 한국의 검은 화강석과 대리석, 그리고 하나하나가 조화미를 가지면서도 곡선미가 살아있는 한국건축의 정수를 담고자 했다. 번화가에서 지반이 단단한 귀진사(鬼眞砂)를 10m 이상 굴토하는 지하 2층 공사는 그야말로 난공사였다. 인가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위에 널말뚝(Sheet Pile) 342매를 박아 굴토작업을 했고, 인접한 미 대사관, 반도호텔의 특수성을 감안해 제한된 시간에만 중기를 사용했다. 노심초사한 보람도 없이 9월 쏟아진 폭우로 온 공사장이 물에 잠겼다. 지하실에 얽힌 복기용 목재는 마치 거미줄과도 같았고, 그 속에서 남루한 옷을 기우는 듯한 공사들을 진행했다. 차량의 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한 지역에 작업장도 없고 자재 야적장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 공사를 해야 했다."
삼성빌딩 건설을 담당했던 동화부동산 직원들의 증언이다. 동화부동산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나라 인텔리전트 빌딩의 시초이자 삼성그룹 최초의 사옥인 삼성빌딩을 성공적으로 건설해냈다.
삼성빌딩 건설을 담당했던 동화부동산 직원들의 증언이다. 동화부동산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나라 인텔리전트 빌딩의 시초이자 삼성그룹 최초의 사옥인 삼성빌딩을 성공적으로 건설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