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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개발의 시범장 용인자연농원

50-YEAR STORY

국토개발의 새 장

국토개발의 시범장 용인자연농원

1973.12 저수지, 광활한 개발단지에 조림을 하기 위해 선결되어야 했던 물
1974년 7월 15일 용인종합산림개발단지를 '용인자연농원'으로 명명했다. 비옥한 땅에는 유실수와 경제림을, 척박한 땅에는 양돈사업을 시행해 개량돈 개발과 조림에 필요한 퇴비를 공급했다. 또 묘포나 양돈에 필요한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저수지를 조성하고 양어와 낚시터를 겸하도록 했다.
용인자연농원의 이러한 개발과정은 말 그대로 '국토개발의 시범장' 그 자체였다. 용인자연농원 개발에 임하는 중앙개발 임직원들은 '실패하면 우리나라에 산지개발은 없다'라는 사명감과 각오로 열정적인 노력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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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조림단지
물론 사업 초기 단계에서는 수많은 난관에 부딪쳤고 이를 극복해야 했다. 우선 국토이용에 관한 전반적인 인식이 부족했고, 산지개발에 대한 국민의 관심 또한 매우 낮았다. 기업 조림에 관한 정보 부족으로 사업의 경제성 제고를 위한 자료수집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게다가 산림관계 법령만도 10여 가지나 되고 일관성이 없는 데다 행정조직 자체의 경직성 때문에 사업 진척이 초기에는 지지부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5년간에 걸쳐 46억 원을 투입해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종합농장인 용인자연농원을 완성해 나갔다. 경제조림단지를 비롯해 밤ㆍ호두단지, 묘포장, 축산단지, 그리고 가족동산 등 실로 방대한 규모였다. 경제조림단지에는 다른 나무에 비해 생장이 빠른 오동나무, 잣나무, 은행나무를 식수해 산림녹화와 더불어 소득증대를 추구했으며, 유실수단지에는 밤나무를 주종으로 하여 호두나무, 살구나무, 은행나무 등을 심었다. 용인자연농원은 종합묘포장을 함께 조성해 품종개량과 작물재배기술을 발전시켜 우리나라 풍토에 적합한 1200종의 신개량종을 개발하는 등 생산성을 높였다.
1976 일본으로 수출된 밤
용인자연농원에서 수확한 살구, 밤 등은 생과와 가공품으로 제조해 시판됐다. 특히 밤나무 단지에서는 1975년 29톤의 첫 결실을 거둔 이래 놀라운 증산을 보여 1976년 10월에 선진국이었던 일본에 국내 최초로 밤 5톤을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밤, 살구 수확물을 수출하여 우리나라 농산물 수출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농고생 실습교육이나 산지개발 세미나 등 자연농원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개방해 기업농으로서 실습교육의 역할을 다했다.
1973년에 614두로 시작한 양돈사업은 1979년에 5개 양돈장에서 3만 2000두의 돼지를 사육하는 국내 최대 양돈장으로 발전했다. 1976~1979년까지 자연농원 양돈장에서 생산 출하된 돼지는 10만 두에 달했으며 6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무엇보다 3원교배의 품종개량으로 '과학양돈'을 실현하며 증산효과는 물론 개량돈 보급, 비육돈 수출의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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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개발에 대한 뜨거운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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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무어라 해도 나의 국토개발에 대한 뜨거운 이상은 꺾지 못할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에 나의 온갖 정성과 노력을 쏟은 자연농원이 산지개발의 시범장으로서 후세에 길이 남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980년 7월 전경련 최고경영자회의에서 이병철 선대회장이 용인자연농원에 대한 의지를 밝힌 것처럼 수백만 주의 나무를 직접 보살피며 국토개발에 열정을 쏟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으로 용인자연농원은 황무지에서 생동하는 땅으로 다시 태어났다.
자연농원 개장식이 치러진 1976년 4월 17일, 자연농원 곳곳에는 "이곳을 보시고 버려진 48억 평 국토에 내일을 가꿉시다"라는 글귀가 쓰여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자연농원이 국토개발의 시범장임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동시에 개발에 임했던 임직원들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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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CLIP 컨텐츠

  • 1975년 종합묘포장의 전경
  • 양돈사업을 위해 비행기로 공수한 원종돈 614두
  • 종합묘포장에 심어진 묘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