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에서 '생동하는 땅'으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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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춧돌을 세우다

불모지에서 '생동하는 땅'으로 변모

대규모 조림사업, 지하수 개발과 환경사업 개시(1970년대)

중앙개발이 조림사업을 시작한 용인군 포곡면 일대
이병철 선대회장은 1950년대 삼성을 처음 일으킬 때부터 대한민국 산야에 나무를 심어 녹화시킴으로써 산지개발을 통한 국토확장을 이룩해야겠다는 꿈을 품었다. 국토를 확장시키는 방법에는 해안을 매립하는 간척사업도 있지만 이는 장기적이고 대규모 투자가 수반되어야 하기에 이제 막 경제재건을 시작한 우리나라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대신 국토의 7할을 차지하는 산지를 개발해 국토를 효율적으로 사용,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간척사업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이었다. 1968년 UN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경사 30도 미만의 개발이 가능한 임야는 160만ha(48억 평)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버려진 160만ha의 땅을 개발하는 것이 바로 국토확장을 의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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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선대회장은 산림녹화를 구상하며 국내외 임학, 농학, 축산부문의 전문가들과 산지개발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으로 모색했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조림사업이야말로 국토를 확장하고 식량자급을 도우며 산림녹화 그리고 공업화에 따른 농업부문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적극 기여하는 사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1970년에 접어들어 이를 실천하기 위해 중앙개발에 개발대상 산지조사 지시를 내렸다.
중앙개발은 전국을 누비며 지형과 지세를 살피고 자료수집에 심혈을 다한 결과 용인지역, 경주 근처 산지, 추풍령고개 근처, 문경새재 일대 등 4개 지역을 후보지로 선정했다. 경주근처 산지와 추풍령고개 근처, 문경새재 일대는 조림을 하는 데는 적지였지만 교통이 나빠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없었다. 이에 비해 용인지역은 토질이 척박해 조림에는 비교적 적합하지 못했지만 서울 인근지역이라는 절대조건에 부합했다. 국토개발의 시범장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곳이 바로 용인군 포곡면 일원이었다.
용인지역의 개발사업은 우리나라 국토개발의 모델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개발방향의 설정이 치밀하고 과학적인 고도의 분석과 종합의 구도를 지녀야 했다. 국내에 산지개발 사례나 해당분야의 전문가가 전무한 상태에서 이는 무(無)에서의 출발을 의미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서울대 입목육종연구소 등 국내외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조언을 들으며 사업장 배열과 수종선택 등 용인개발의 윤곽을 잡아 나갔다.
중앙개발은 1970년 2월부터 용인군 포곡면의 신원리, 유운리, 가실리, 마성리, 영문리 일원 지역에 대한 부지를 확보했다. 이어 대규모 조림을 위한 양질의 묘목을 다량 확보하기 위해 1972년 2월부터 수원 근처 천천동에 밤나무 묘목 15만 본,
경제조림의 진가를 발휘한 밤나무
호두 5000본, 화목(매화, 화해당) 1만 본을 일본에서 도입해 가식(假植)했다. 그해 4월에는 용인지역 토질에 적합한 수종선정과 관리기술상의 문제를 모색하기 위해 종합토양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조림 최적지에 유실수를 심는다 △고지대와 토질이 척박한 지역에는 용재수종으로 조림해 임산자원을 확보한다 △능선과 불용지에는 방풍보호림을 조성한다 △조림이 불가능한 지역에는 양돈단지와 자연동물원을 조성해 산지의 효용성을 극대화한다의 조림방향을 설정했다.
이병철 선대회장도 "산지개발사업은 결국 채산성이 있어야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성이 없으면 아무리 조림이 잘되어 있어도 실패다. 그런 것은 권장할 수도 없고 국가에도 이(利)가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전 단지의 조성방향을 제시한 바 있었다. 개발방향의 확정에 따라 1972년 4월 밤나무를 4만여 주 식재하면서 전 단지에 대한 조림을 시작했다.
1976 일본으로 수출된 밤
1973년 3월 종합묘포장을 조성했으며, 연 수십 만 명의 인원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조림사업에 투입, 마침내 1975년 4월 경제조림을 완성했다. 밤나무 단지에서는 개량종 밤나무를 도입해 1975년에 29톤의 첫 수확을 거둔 이래 1976년 80톤, 1979년 300톤으로 놀라운 증산을 보였다.
1976 을지로 롯데호텔 신축공사에서 지하수 개발
중앙개발은 산지개발 정신과 맥을 같이해 공익적 사업으로서 지하수개발을 본격화했다. 산업의 급속한 발전, 생활수준의 향상, 인구증가와 도시집중이 진행되면서 1970년대 들어 용수 수요가 급증했지만 공급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중앙개발은 1974년부터 지하수개발사업을 본격화하여 그해 5월 용인개발단지에 제1호 공(孔) 시추에 들어갔고, 6월 26일 심도 108m, 일일평균채수량 650톤의 지하수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기술로 통상 3개월 정도 소요되는 작업이었지만, 중앙개발은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기술로 28일 만에 착정을 완료했다.
제1호 공 개발에 성공한 중앙개발은 기업의 용수문제 해결에 본격적으로 나서 1974년에 제일합섬 구미와 경산공장에서 2700여 톤의 지하수를 개발했다. 1975년 2월 18일 과학기술처에 '응용이학 지질분야 전문기술용역업' 등록을 마치고 전국 각 공장을 대상으로 지하수개발을 확대했다. 이에 따라 1985년까지 총 781공 22만여 톤의 지하수를 개발, 국내 수많은 기업들의 공업용수를 해결해 주었다.
1977 전북 이리 피혁공장 내 폐수처리장치
중앙개발은 또한 1975년 4월 수질오염 문제를 다루기 위한 폐수처리사업에 나서기로 하고 그해 7월 양돈장의 1만 두 배설물을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의 폐수처리시설을 설치했다. 1977년 전북 이리공단 등 7개 업체의 폐수처리시설을 준공했으며, 1979년 12월 환경연구소를 설립해 전자동압착탈수기를 자체 제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종합건설업면허가 없어 대형 관급공사를 수주할 수 없었고, 지하수개발에 더욱 주력하기 위해 1981년 9월 14일 환경사업 일체를 대성중공업으로 이관했다.
1981 전남 여천 돌산 앞바다에서 해저 지질조사를 하고 있는 중앙호
중앙개발은 지하수개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지질조사까지 수행했다. 1975년 4월 한국개발금융 신축건물의 지질조사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공장, 건축물, 댐 등이 건설될 부지에 지질조사와 지질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기술역량을 축적해 나갔다. 1980년 12월에는 국내 최초로 해상시추선(Self Elevating Platform) '중앙호'를 제작하고, 1983년까지 4개 지역에 대한 해상지질조사를 벌였다. 1976년 11월에는 건설부로부터 단종공사면허(상하수도 설비공사업과 보링그라우팅 공사업의 면허)를 취득하고 1977년부터 지반개량과 지반보강 등 기초처리분야에 진출했다. 1980년대 서울시 지하철 2,3,4호선 공사로 기초처리부문은 호황을 맞아 1985년까지 1만 4000여 공을 굴착했으며, 지하철공사가 끝난 후에는 이를 빌딩신축공사에 적용,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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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 탐사 기술의 개발 관련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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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방사능 탐사기술을 비롯해 전기비저항탐사, 자연전위측정, 지역측정에 의한 탐사기술을 습득하며 지하수 탐사기술체계를 정립해 나간 중앙개발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기술 개발에 진력해 수평보링공법과 특수집수정을 개발하는 개가를 거뒀다. 1974년 6월 용인개발단지의 제1호 공에서 650톤의 지하수를 개발했으나 해당 지역의 일일필요수량 1만 4000톤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양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용인개발단지를 수차례에 걸쳐 탐사한 결과 지하수맥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상당량의 지표수가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구조임을 알게 됐다. 이에 용수해결을 위한 최상의 방법으로 만주식 정호 설치가 대두됐다.
만주식 정호는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수직으로 파 들어가다가 다시 수평으로 굴토해 물줄기를 찾고, 물줄기에 파이프와 같은 관을 묻는 방식으로서 대용량의 지하수를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수평굴토 시 붕괴위험이 따르고 작업이 복잡해 설치기간이 오래 걸리는 등 문제점이 많아 국내에서 시도된 전례가 없었다.
만주식 정호의 결점을 보완해 대용량의 지하수를 확보하기 위한 1년여의 연구 결과 수평보링공법을 고안해내는 데 성공했다. 수평보링기는 1975년 6월 제13160호로 실용신안특허를 받았다. 1976년 1월 용인개발단지에 만주식 정호를 개량한 특수집수정을 설치하고 수평보링공법을 활용해 일일평균 4500톤의 지하수를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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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년 국내 기술로는 처음으로 유성에 온천 개발
  • 용인단지를 개발하며 다양하게 활용된 유니목
  • 벌채된 후의 신원리 산지